1929년 대공황 이전의 숨겨진 신호들
1929년 10월의 "검은 목요일"이 오기 전, 미국 경제는 이미 붕괴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영원한 번영"을 믿었지만, 오늘날 우리가 돌아보면 곳곳에 위험 신호가 점멸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소득 불평등의 심화, 과잉생산, 투기 열풍, 농업 침체 등 구조적 문제들이 1920년대 내내 축적되면서 경제 시스템을 취약하게 만들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일부 경제학자들, 특히 스웨덴의 요한 오케르만 같은 학자들이 이미 1928년부터 심각한 주식 폭락을 경고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주류 경제학계와 정책 결정자들은 이런 경고를 무시했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경제학자들도 놓친 수학적 경고 신호
크리스티나 로머와 요한센 등 현대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1929년 대공황은 예측 가능했던 위기였다. 물리학에서 "임계점 이론"을 금융시장에 적용한 요한센, 르두아, 소르네트의 연구는 특히 흥미롭다. 이들은 주식 시장 폭락이 물리학의 "상전이" 현상과 유사하다고 분석했다. 개별 거래자들의 모방 행동이 연쇄 반응을 일으켜 전체 시스템의 협조적 붕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의 수학적 모델이 1929년 폭락을 8년 전부터 예측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1921년부터 시작된 주가의 "로그 주기적 진동" 패턴을 분석하면, 1929년 10월경을 가장 위험한 시점으로 지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수학적 도구가 없었고, 경제학자들은 전통적인 분석 방법에만 의존했다.
크리스티나 로머의 연구는 다른 각도에서 위기의 예측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녀는 1929년 폭락이 소비자들에게 "미래 소득에 대한 극심한 불확실성"을 야기했고, 이것이 내구재 구매를 급격히 위축시켰다고 분석했다. 중요한 점은 이런 불확실성 전파 메커니즘이 이미 1920년대 후반 경제 구조의 취약성 때문에 예견 가능했다는 것이다.
1920년대 번영의 허상과 구조적 모순
표면적 번영 뒤에는 심각한 구조적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1922년부터 1929년까지 미국의 실질 GNP는 연평균 4.7% 성장했고, 실업률은 3.7%에 불과했다. 제조업 생산지수는 1921년 67에서 1929년 125로 뛰어올랐다. 다우존스 지수는 1921년 8월 63에서 1929년 9월 381로 무려 6배나 상승했다.
하지만 이런 화려한 수치들 뒤에는 극심한 소득 불평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1928년까지 상위 1%가 전체 세전 소득의 23.9%를 차지했는데, 이는 금도금 시대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1920년대 동안 상위 1%의 소득은 75% 증가했지만, 나머지 99%는 겨우 9% 증가에 그쳤다. 미국인의 60%가 빈곤선 이하에서 살았고, 80%의 가정은 사실상 저축이 전혀 없었다.
이런 소득 집중은 소비 기반을 근본적으로 취약하게 만들었다. 대량 생산 경제를 뒷받침할 대중적 구매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자동차 산업의 경우, 1920년대 말에는 중산층 가정 대부분이 이미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어 신차 수요가 급격히 감소했다. 과잉생산이 곳곳에서 발생했지만, 기업들은 이를 일시적 현상으로 치부했다.
투기 열풍과 신용 거품의 위험한 확산
연방준비제도의 정책 실수가 투기 열풍을 부채질했다. 1922년부터 1927년까지 연준은 인위적으로 낮은 금리를 유지했고, 주요 은행들의 준비금 요건을 완화했다. 1920년대 동안 미국의 통화 공급량은 거의 60% 증가했다. 1927년에는 영국의 금본위제 복귀를 돕기 위해 금리를 인하했는데, 이것이 의도치 않게 주식 투기를 더욱 자극했다.
그 결과 마진 거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29년 중반까지 3억 주가 마진으로 거래되고 있었고, 이는 뉴욕 증권거래소 시가총액의 10-20%에 해당했다(현재는 1-2%). 155만 개 계좌 중 60만 개가 마진 계좌였다. 평균 마진 요구율은 40-50%였지만, 실제로는 10-15%의 자기자본으로도 주식을 살 수 있었다. 주식 구매를 위한 대출금은 85억 달러를 넘어섰는데, 이는 당시 유통 중인 전체 화폐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은행들 자체가 주식시장에 깊이 관여했다는 점이다. 전체 은행의 90% 이상이 주식시장에 투자했고(가계의 주식 보유율은 10%에 불과했는데도), 전통적으로 유지하던 현금 준비금마저 줄여가며 투기에 참여했다. 이는 시스템 전체를 극도로 취약하게 만들었다.
이미 시작된 농업 공황과 부동산 버블
많은 사람들이 간과한 사실은 농업 부문이 이미 1920년부터 공황 상태였다는 점이다. 농산물 가격 지수는 1920-1921년 사이 53.3% 폭락했다(소비자 물가는 11.3% 하락에 그쳤다). 농가 소득은 1919년 177억 달러에서 1921년 105억 달러로 41% 급감했다. 미네소타 농가들의 총현금소득은 1918년 4억 3800만 달러에서 1932년 1억 5500만 달러까지 떨어졌다.
농가 부채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에이커당 담보 부채가 135% 증가했고, 미네소타 농장의 52.4%가 총 2억 5400만 달러가 넘는 담보 부채를 지고 있었다. 농지 가치는 1920년부터 1930년까지 22%에서 43%까지 하락했다. 전미 역사상 처음으로 경작지 면적이 감소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부동산 부문에서도 숨겨진 거품이 먼저 터졌다. 1924-1926년 플로리다 부동산 광풍에서 부동산 가격이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4배나 뛰었다. 마이애미에는 2천 개의 부동산 중개소와 2만 5천 명의 중개인이 있었고, 하루에 10번씩 매매되는 땅도 있었다. 하지만 1926년 허리케인이 플로리다를 강타하면서 부동산 열풍은 완전히 사라졌다.
전국적으로도 주택담보대출 부채가 1920년 94억 달러에서 1930년 302억 달러로 폭증했다. 1934년에는 자가소유 주택의 41.9%가 연체 상태에 빠졌고, 클리블랜드 같은 도시에서는 61.9%까지 치솟았다.
경제학자들의 판단 착오와 이론적 맹점
당시 최고의 경제학자들조차 위기를 예견하지 못한 이유는 이론적 틀 자체의 한계 때문이었다. 어빙 피셔는 1929년 10월 15일, 폭락 불과 2주 전에 "주가가 영구적으로 높은 수준에 도달한 것 같다"고 선언했다. 조셉 슘페터가 "미국이 배출한 최고의 경제학자"라고 평가한 피셔조차 "신시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피셔의 확신은 단순한 희망사항이 아니라 그의 경제 이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기술 진보, 개선된 기업 경영, 연방준비제도의 안정화 정책이 경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고 믿었다. 주식이 채권 대비 저평가되어 있다고 판단했고, 자신의 이론에 따라 주식시장에서 10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그리고 폭락으로 1100만 달러를 잃었다).
스웨덴 학파 경제학자들의 견해는 더욱 흥미롭다. 구스타프 카셀과 베르틸 오린은 주식시장 투기가 실물경제와 분리되어 있다고 보았다. 카셀은 "주식시장의 호황과 불황은 자본이나 구매력을 창출하거나 파괴할 수 없다"며, "모든 매수자에게는 매도자가 있기 때문에" 주식시장 변동이 전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요한 오케르만만은 달랐다. 하버드에서 사업순환 예측을 공부한 오케르만은 1928년부터 줄곧 "심각한 주식시장 폭락이 임박했다"고 경고했다. 그는 동료들의 이론적 맹목성을 비판하며 "생산능력과 구매력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실체"라고 주장했다. 오케르만은 경제 시스템의 심리적, 상호연결적 특성을 이해했던 몇 안 되는 경제학자였다.
연방준비제도의 정책적 혼란
연준의 정책 혼란도 위기를 키운 주요 원인이었다. 1914년부터 1928년까지 뉴욕 연준을 이끈 벤저민 스트롱이 1928년 10월 사망한 것은 결정적 타격이었다. 스트롱은 유럽 중앙은행가들과 긴밀히 협력하여 국제 통화 안정성을 유지해왔는데, 그의 사후 연준은 리더십 공백 상태에 빠졌다.
더 근본적 문제는 "실질어음 원칙"이라는 18세기 이론에 연준이 매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 원칙에 따르면 은행들이 실제 상품을 담보로 한 상업어음에만 대출하면 통화 공급량이 자동으로 경제 필요에 맞춰 조절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 이론은 생산적 대출과 투기적 대출을 구분할 수 없었고, 금융시장의 상호연결성을 무시했으며, 신용 수요가 자연적으로 자기제한적이라고 가정하는 치명적 한계가 있었다.
국제적 요인도 위기를 증폭시켰다. 1차 대전으로 미국은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변했고, 세계 금 보유량의 40%를 차지했다. 복잡한 전쟁 배상금과 연합국 간 부채 구조가 불안정한 순환 지불 시스템을 만들었다. 미국이 무역 흑자를 기록하면서도 대출 상환을 요구하는 상황은 지속 불가능했다.
무시된 경고들과 집단 착각
몇몇 통찰력 있는 인물들의 경고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1929년 9월 5일 통계학자 로저 밥슨은 "조만간 폭락이 올 것이며, 그것은 참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의 경고로 당일 주가가 3% 하락하는 "밥슨 브레이크"가 일어났지만, 월스트리트는 그를 조롱했다. 시카고 트리뷴은 여러 경제학자들의 반박 기사를 실었고, 그의 애국심까지 의심받았다.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들도 일찍부터 경고했다. 루드비히 폰 미제스는 1920년대 중반부터 연준의 인플레이션 정책을 비판했고, F.A. 하이에크는 1929년 2월 연준 정책이 주식과 신용시장 위기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전 연준 이사 폴 워버그도 1929년 3월 과도한 투기에 대해 경고했지만, 모두 무시되었다.
"신시대" 이데올로기가 만연했던 것이 이런 경고들이 묵살된 이유였다. 대량생산, 자동차, 라디오, 전기화가 무제한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고 믿었다. 새로 설립된 연준이 금융 공황을 "해결"했다는 확신도 컸다. 경제 통계와 예측 기법의 발달은 경제 세력에 대한 과학적 통제가 가능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가 지적했듯이 **"집단적 환상으로의 대량 탈출"**이 자기강화적으로 작용했다. 예일대 경제학자부터 월스트리트 은행가까지 모두가 같은 낙관론을 공유할 때, 반대 목소리는 쉽게 묵살되었다.
붕괴로 향한 완벽한 폭풍
1929년에 이르러 모든 구조적 취약점들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얽혀들었다. 극심한 소득 불평등으로 소비 기반이 협소해졌고, 과잉생산이 곳곳에서 발생했으며, 농업과 부동산 부문은 이미 침체에 빠져 있었다. 은행들은 투기에 깊이 관여했고, 마진 거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국제 통화 시스템은 불안정했고, 정책 당국은 시대착오적 이론에 매몰되어 있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위험 신호들이 당대에도 관찰 가능했다는 점이다. 농장 압류율이 1913-1920년 1000농장당 3.2건에서 1926년 17.4건으로 치솟았고, 소득 집중도는 측정 시작 이래 최고 수준에 달했으며, 마진 거래 규모는 역사상 유례없는 수준이었다. 스웨덴의 오케르만 같은 학자는 이미 1928년부터 폭락을 경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표면적 번영에 도취된 사람들은 이런 신호들을 의도적으로 외면했거나 일시적 현상으로 치부했다. 경제 이론의 한계, 정책적 무능, 그리고 집단적 환상이 결합되어 20세기 최대의 경제 위기로 가는 길을 열어젖혔다.
다음 편에서는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부터 시작된 5일간의 공포가 어떻게 이 모든 구조적 취약점들을 한순간에 폭발시켰는지 살펴볼 것이다. 수십 년간 쌓인 불균형들이 불과 며칠 만에 전 세계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과정을 생생히 재구성해보자.